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 (리처드 도킨스 비판) 책, 논문, 기사 비판

리처드 도킨스는 1976년에 출간한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만약 나와 같이 여러분도 개인들이 공공 선을 위해 너그럽고 비이기적으로 협동하길 바란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음을 명심하자.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하자. (The Selfish Gene, 3, 많은 경우 출간된 한국어판과 번역이 다르다)

 

만약 인간의 도덕에 대해 끌어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이타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라고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The Selfish Gene, 139)

 

내가 직접 이 구절을 읽지 않았다면 이런 말을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도킨스는 어떻게 유전자 수준의 “이기성”이 개체 수준의 이타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재미있고 알기 쉽게 설명했다. 그런 책에서 책 전체의 테마와는 정반대 되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만약 자연 선택에 의해 친족애, 우정, 부부애, 양심, 죄책감, 정의감 등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만약 이런 것들이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이 아니라면 “개인들이 공공 선을 위해 너그럽고 비이기적으로 협동하길” 바라는 것은 헛된 꿈일 뿐이다. 모든 인간이 사이코패스처럼 진화했다면 도대체 어떻게 비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인간을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라고 했는데 “인간이 테레사 수녀나 슈바이처가 상징하는 것만큼 이타적이지는 않다(인간은 천사가 아니다)”는 뜻이 아니라면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라고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무한한 이타성이 생물학적 본성의 일부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라는 의미가 아니라면 헛소리에 불과하다.

 

 

 

다행히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의 30주년 기념판(2006)에 붙인 머리말에서 이 구절에 대해 자기 비판을 했다.

 

이것은 특히 1장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하자’라는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는 것에 잘못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오도적이다. (The Selfish Gene, ix)

 

 

 

도킨스가 이전에 단순히 말실수를 했으며 그것을 교정함으로써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일까?

 

아니다. 도킨스는 30주년 기념판에 붙인 머리말에서 이런 말도 했다.

 

우리의 뇌는 우리의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을 일으킬 만큼 진화했다. 우리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실은 피임 수단의 사용이다. (The Selfish Gene, xiv)

 

반면 1982년에 쓴 『확장된 표현형』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문외한인 비판자들은 부적응적으로 보이는 현대 인간의 행동들입양과 피임을 ‘이기적 유전자로 설명해보라’고 도전장을 던진다. ... 입양과 피임은 읽기, 수학, 스트레스에 의해 유발된 질병과 마찬가지로 유전자가 자연 선택된 환경과는 매우 다른 환경에서 사는 동물[인간]의 산물이다. (The Extended Phenotype, 36)

 

피임에 대해 도킨스는 한편으로 “반란”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로 설명한다. 먹을 것이 부족했고 육체적으로 많이 움직여야 했던 과거 사냥-채집 사회에서 진화한 인간의 지방 축적 기제와 식욕 조절 기제가 먹을 것이 풍부하고 육체적으로 별로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비만을 일으킬 수 있다. 이것이 진화 생물학자들이 말하는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로 생기는 부적응적 결과”다.

 

생물은 자신이 진화한 환경과 판이하게 다른 환경에서 살면 부적응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있다. 물고기를 땅 위에 올려 놓고 잘 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며, 맨몸인 인간을 망망대해 속에 빠뜨려 놓고 잘 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로 생기는 부적응적 결과”라는 말은 진화 생물학을 어느 정도 배운 사람이라면 그 뜻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도킨스가 말하는 “반란”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냥 시적인 표현이니까 꼬치꼬치 따지지 말아야 할까? 이 글에 인용된 구절들을 다 고려해 볼 때 그냥 시적인 표현이라고 넘어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위에서 인용했듯이 도킨스는 『확장된 표현형』에서 “입양과 피임”을 비슷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이기적 유전자』에서는 그 둘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것들은 심지어 유전자의 독재에 반란(rebel)을 일으켜 예컨대 자신들의 능력이 되는 대로 많은 아이를 가지기를 거부할 정도다. (The Selfish Gene, 59)

 

우리는 대부분의 입양을 (그것이 아무리 감동적으로 보인다 해도) 내장된 규칙의 오작동(misfiring, 불발)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The Selfish Gene, 101)

 

피임에 대해서는 “반란(rebel)”이라는 딱지를, 입양에 대해서는 “오작동(misfiring)”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여기서 말하는 “오작동”의 의미는 진화 생물학계에서는 명백하다. “친족애(예컨대 자식 사랑)를 위한 심리 기제가 오작동해서 애완 동물을 지극정성으로 돌본다”라는 식의 설명을 들으면 진화 생물학자나 진화 심리학자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이해한다(여기에서는 이런 설명이 옳은지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조상들이 진화할 때 자식-사랑 조절 기제는 자식을 잘 돌보도록 만듦으로써 유전자 복제에 도움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기제가 자연 선택될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신의 유전자 복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애완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발현되는 것이 바로 오작동이다.

 

수십 만 년 전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애완 동물을 기를 일이 사실상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과 개를 잘 구분해서 작동할 만큼 자식-사랑 조절 기제가 정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개나 다른 동물을 애완 동물로 기르는 일이 많은 사회로 환경이 바뀌었다. 이런 과거와 현재의 환경 차이가 부적응적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TV도 컴퓨터도 없었던 사냥-채집 사회에서 진화한 남자가 모니터 속의 벗은 여자를 보고 발기하는 현상은 그리 이상하지 않다.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모니터 속의 여자와 실제 여자를 구분해서 후자의 경우에만 발기하도록 할 정도로 정교한 발기 조절 기제가 필요 없었다.

 

 

 

2003년에 출간된 『악마의 사도』에 있는 「악마의 사도」란 글에서 도킨스는 이렇게 말했다. 「악마의 사도」는 이전에 발표된 적이 없는 글로 이 책에 처음 실렸다. 따라서 2003년 경의 도킨스의 생각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T. H. 헉슬리는 1893년 옥스퍼드 대학의 로먼스 강연에서 ‘진화와 윤리학’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사회의 윤리적 발전이 우주의 과정을 모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에서 달아나지 않는 데에 있는 것도 더더욱 아니며, 그것과 맞서 싸우는 데 있다는 것을 이해하자.

그것이 바로 지금 조지 윌리엄스가 충고하는 것이며, 그것은 내 생각이기도 하다.

그런 한편으로 나는 내 첫 저서를 끝맺으며 쓴 문장이 진리임을 언제나 확신해왔다. “우리, 지구에서 오직 우리만이 이기적인 복제자들의 독재에 맞설 수 있다.

피임법을 쓴 때마다 우리는 뇌가 다윈주의의 계획을 훼방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악마의 사도』, 27쪽 이하)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인간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순수한, 사심 없는, 진짜 이타성을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일지도 모른다. (The Selfish Gene, 200)

 

 

 

여기서 “순수한, 사심 없는, 진짜 이타성”은 문맹상 친족 선택, 호혜적 이타성 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타성 즉 유전자의 이득을 초월한 이타성을 뜻하는 것 같다.

 

만약 인간의 이타성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라면 꼭 인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그런 한계보다 더 이타적일 수 있다.

 

그것은 돌연변이 유전자 때문일 수도 있고, 유전자 표류(genetic drift, 유전적 부동) 때문일 수도 있고,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돌연변이, 유전자 표류, 과거 환경과 현재 환경 사이의 차이가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자연 선택은 완벽하지 않아서 때로는 부적응적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며 그 부적응적 행동의 방향이 순수한 이타성을 향할 때도 있다. 이것은 인간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다.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의 독재”와 “유전자의 독재에 맞서는 반란”의 의미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은 유전자의 독재에 순종하고 인간만 유전자의 독재에 맞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보는 이분법은 뭔가 이상하다. 부적응적 행동은 인간만 하는 것이 아니다. 부적응적 행동의 방향이 순수한 이타성을 향하는 것도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만 해당되도록 “반란”이라는 말을 쓸 수는 있을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에 맞서기로 의식적으로 결심한 후 행동하는 것을 “반란”이라고 부른다면 지구상에서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콘돔 사용은 반란이 아니다. 콘돔을 사용하는 사람들 중에 “나는 이기적 유전자의 복제에 거스르기 위해서 콘돔을 쓴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몇 %나 될까? 그냥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 콘돔을 쓰는 것이다.

 

“원치 않는 아이를 낳고 싶지 않아서”라는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도 결국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어떤 심리 기제에서 나온 것이다. 성적 욕망과 자식-사랑 기제도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싶어하지 않도록 하는 모종의 심리 기제도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끼리 티격태격 한다면 그것을 이기적 유전자에 맞서는 반란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도킨스는 성욕, 친족애와 같이 자식을 낳도록 하는 심리 기제는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라고 보고, 골치-아픈--피하기 기제나 도덕성 기제는 하늘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가정하는 것 같다. 그런 암묵적 가정 때문에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골치-아픈--피하기 기제나 도덕성 기제도 성욕 기제나 친족애 기제만큼이나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따라서 양심 기제를 억누르고 싸가지 없는 일을 하는 것이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라면 (별 위험 없이 강간을 할 기회가 생겼을 때) 성욕 기제를 억누르고 여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것도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우리는 이기적 유전자에 맞서 반란을 일으킬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물리 법칙에 맞설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늘을 나는 헬륨 풍선은 중력이라는 물리 법칙을 초월한 것이 아니다. 부력(결국 전자기력)이 중력보다 세기 때문에 뜰 수 있을 뿐이다. 부력도 물리 법칙의 일부고 중력도 물리 법칙의 일부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기성도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이고 인간의 이타성도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이다. 또한 도덕성 즉 양심, 규범, 죄책감, 도덕적 분노 등도 이기적 유전자의 산물이다. 적어도 일부 진화 윤리학자들은 도덕성과 관련된 심리 기제들이 자연 선택의 직접적 산물인 적응(adaptation)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성욕이 없다면 성욕과다(nymphomania)가 생기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도덕성 기제가 없다면 도덕성과다(moralomania?)도 생기기 힘들다.

 

성욕과다가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라면 도덕성과다도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 아니다.

 

 

 

도킨스는 자연 선택에 너무 집착한다는 비판을 듣고 산다. 하지만 이 글의 맥락에서 볼 때에 도킨스는 적어도 나보다는 자연 선택에 덜 집착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남몰래 기독교적 세계관(인간은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이유는 선하기 때문이다, 도덕성은 자연 선택의 산물이 아니라 신의 선물이다)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도킨스는 좀 더 다윈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물론 도킨스는 그런 기독교적 세계관을 잘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에 맞선 반란”이라는 테마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자신이 했던 말과는 다른 생각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적어도 이 글에서 인용한 도킨스의 말을 전투적(?) 진화 생물학자인 도킨스의 체면을 세워주는 방식으로 해석하기가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여러분이 그런 해석에 도전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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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27


덧글

  • Identity 2014/02/27 14:13 #

    만약 나와 같이 여러분도 개인들이 공공 선을 위해 너그럽고 비이기적으로 협동하길 바란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는 거의 기대할 것이 없음을 명심하자.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너그러움과 이타성을 가르치도록 하자. (『The Selfish Gene』, 3쪽, 많은 경우 출간된 한국어판과 번역이 다르다)’

    인용문에서 이덕하님이 좀 더 짚고 넘어가실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공공 선을 위해”라는 대목입니다. 늘 강조 드리지만 생물의 이타적 행동은 결국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그 복제본의 빈도를 높이기 위해 진화되어 온 산물입니다. 만약 그 것이 유전자 풀에서 유전자의 빈도가 줄어드는 방향이나 정체되는 방향이라면 거기에 해당하는 이타적 행동은 진화하기 어렵습니다. 즉 유전자로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타적 행위”들이 진화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말입니다. 즉, 따라서 도킨스는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공 선을 위한” 이타성은 진화할 수 없으며(=생물학적 본성으로 보기 힘들며) 거기에 해당하는 이타성은 교육을 통해 어린 아이들에게 심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물건 건들지 마라’ 같은 규범이 없는 아이들은 손 버릇이 나쁘듯이요. 도킨스의 말을 우리가 ‘친족애, 우정, 부부애, 양심, 죄책감, 정의감’ 등이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지나친 과장입니다. 어디까지나 이기적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에도 방해가 되거나 영향을 주지 않는 이타성에 대해서도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죠. 게다가 도킨스의 말을 모든 인간이 ‘싸이코패스처럼 진화했다’라고 해석하시는 모습은 개인적으로 이덕하님께 조금 실망스럽습니다.

    비만을 예로 드셨는데, 제 생각에는 잘 집으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식량을 체내에 비축해놓자’라는 유전자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을 말하며, ‘부적응적인 유전자가 진화해왔다’라고 하기보다는 ‘이제는 더 이상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다’라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시리라 믿습니다. 계속 간과하시는 개념은 도킨스가 ‘밈’이라는 개념을 제창하면서부터 모든 트집잡을 거리는 설명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전글에 제가 달았던 댓글을 다시 인용하자면,


    “말씀하신 것 처럼 '고장'과 '오작동'으로 자연계의 생물들이 이타성을 행하거나 자신의 '이기성'을 억누르는 행위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극적인 예외에 불과하는 것 아닌가요? 그 예외에 속하는 행동이 종을 대변하여 이타성을 발휘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이기적 유전자론에 의하면 그 유전자 스스로 유전자 풀에서의 빈도를 높이는 방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이타성을 발휘할 것으로는 보기 힘듭니다.
    하지만 인간은 밈이라는 다른 복제자의 생존 기계이기도 하기 때문에 "유전자 풀에서 빈도를 높이지 않거나 낮추는 방향의 이타성" 역시 할 수 있습니다.”

    이덕하님은 진화이론에 상당히 일가견 있으시고 진화심리학에 대한 안목이 높으신 것 같습니다.
    다만, 밈의 개념에 대해서는 너무 가볍게 여기시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가치관과 생활, 종교, 생각, 지식 모든 것이 밈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답글을 달려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는 것도 밈을 복제하고 상대방의 뇌에 심어주는 것이죠.
    '아기를 갖지 않겠다'라는 말이 어떻게 '유전자 폭정에 대한 의식적인 노력'이 아닐 수 가 있나요?
    그리고 '자기 편하자고' 피임하는 행위는 밈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지 유전자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콘돔이 개발된 것은 인류 역사중 매우 최근의 일이며 다양한 문화권에서 현재는 대부분 콘돔을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콘돔을 사용하도록 진화되었다'라고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극복"이라는 것은 밈의 통치권이 유전자의 통치권보다 강해서 이기적 유전자의 목적달성을 차단하는 것이겠죠.
    인간이 행하는 모든 이타성이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진화에서 비롯되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밈이라는 생존기계로서 어린 아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규범이나 윤리강령, 법, 지식, 언어 등의 밈의 복제본을 뇌에 심어주는 거죠. 이게 곧 교육이고요”


    이 글에 제 모든 의견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Identity 2014/02/27 15:08 #

    아, 딱 하나, '인간만이 유전자의 폭정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생명이다'라는 말은 성급한 것 같다라는 데에는 이덕하님과 같은 의견입니다.
    '모방할 수 있는 뇌'를 인간만이 가졌다고 보기 힘들겁니다. 가까운 예로 침팬지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다만 인간만이 밈을 '기록물'로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일리가 있는것 같습니다.
  • 이덕하 2014/02/27 15:54 #

    Identity /

    1.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공 선을 위한” 이타성은 진화할 수 없으며”

    ---> 공공선을 위한 이타성의 어떤 측면은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공공선을 위한 이타성의 다른 어떤 측면은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요.

    이것은 어느 정도의 친족 이타성이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친족 이타성은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비슷해 보입니다.

    공공선의 경우든 친족애의 경우이든 무한한 이타성은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근친도가 1인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요.



    2. “도킨스의 말을 우리가 ‘친족애, 우정, 부부애, 양심, 죄책감, 정의감’ 등이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지나친 과장입니다.”

    ---> 저는 도킨스가 오락가락한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 점은 도킨스 스스로도 인정했습니다. 제가 인용한 구절에서 “하지만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는 말은 오도적이다”라고 썼습니다.

    피임에 대해서도 반란이라고 했다가 오작동(과거와 현재의 환경 차이)이라고 했다가 오락가락했습니다.



    3. 저는 초이타성 밈(과거 환경에서 적응적이었던 수준을 뛰어넘을 정도의 이타성을 “설교”하는 밈)의 영향력을 덮어놓고 무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실제로 초이타성 밈이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실증적인 문제이며 별로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제 말의 핵심은 초이타성 밈으로 설명하는 것과 오작동으로 설명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초이타성 밈이 없는 환경에서 진화했습니다. 따라서 초이타성 밈이 있는 환경에서는 매우 부적응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콘돔이 없는 사회에서 진화한 인간이 콘돔이 있는 사회에서는 매우 부적응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밈 개념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까지 밈 개념으로 대단한 성과를 이룬 것은 본 적이 없다는 스티븐 핑커의 이야기에 동의할 뿐입니다. 저는 밈 개념이 앞으로도 대단한 성과를 이룰 가망성이 없다고 보는 핑커의 비관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두고 볼 일이지요.



    4. “그리고 '자기 편하자고' 피임하는 행위는 어떻게 밈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이지 유전자에 의해 조종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 저는 “밈에 의한 조종”과 “유전자에 의한 조종”으로 나누는 이분법에 반대합니다. 즉 둘 중 하나만 참이라고 보는 의견에 반대합니다. 이것은 설명의 두 수준일 뿐입니다. 골치-아픈-일-피하기 기제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진화하지 않았다면 가족 계획 밈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5. 인간의 경우 문화의 힘이 다른 동물에 비교할 수 없이 크며, 과거와 현재의 환경 사이의 차이가 대체로 다른 동물보다 매우 크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이런 인간의 특수성 때문에 자연 선택이 “의도한” 수준을 뛰어넘는 이타적 행동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른 동물에 비해 훨씬 클 수 있겠지요. 물론 자연 선택이 “의도한” 수준을 뛰어넘는 이기적 행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마찬가지로 클 수 있습니다.



    6. 요컨대 이기적 유전자가 만들어낸 인간의 온갖 선천적 심리 기제들은 밈이 활동하는 환경을 형성합니다. 따라서 밈을 끌어들인 설명은 선천적 심리 기제들에 대한 가설들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온갖 사회학 이론들이 선천적 심리 기제들에 대한 가설들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회학적 수준에서 이론을 펼치는 것 자체가 이기적 유전자론과 모순되기는커념 이기적 유전자론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밈 수준에서 이론을 펼치는 것 자체도 이기적 유전자론에 기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 Identity 2014/02/27 16:36 #

    1.제 문장에서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를 퍼뜨리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는 종류의 “공공 선을 위한 이타성”이라고 이해하시는 게 제 뜻을 올바르게 받아들이시는 쪽일 겁니다. 저는 공공 선의 이타성이 모두 이기적 유전자의 의도에 합리적이지 않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의한 이타성의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는 선까지만 유효하고 그 이상은 한계가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이덕하님과 생각의 일치를 이룬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2. 도킨스는 오락가락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기적으로 태어났다”라는 말을 철회한 것이지요.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용하신 문장에 따르면, 콘돔을 유전자에 대한 반란(밈의 영향), 그리고 입양을 유전자의 오작동이라고 이해가 되는데요. 물론 입양이 정말로 유전자의 오작동만의 영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밈과의 협동일 수 있습니다. 이 밈의 영향이 ‘유전자의 오작동’에 의한 행동을 더욱 부추겨서 ‘유전자의 정작동’을 억제할 수도 있는거겠죠.

    3. 저도 동의합니다.

    4. 동의합니다. 제 표현이 적절치 못했군요. 밈과 유전자는 서로 반드시 배타적인 관계는 아닐 것입니다. “ ‘자기 편하자고’ 피임하는 행위는 유전자의 진화에 의해서만 발달한 행동으로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 밈의 진화에 더욱 강한 영향을 받은 행동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정도로 수정하겠습니다.

    5. 그 인간의 특수성이 밈의 생존기계로서의 역할이며, 그것이 이기적 유전자의 폭정에 반기를 들 수 있는 힘입니다. “자연선택이 ‘의도한’ 수준을 뛰어넘는 이기적 행동이 일어날 가능성도 클 수 있다는 것”이 도킨스의 말에 대한 반박을 될 수 없을겁니다.

    6. 밈이 활동하는 환경을 유전자가 모두 제공한다고 보기 힘듭니다. 인간의 저술 능력과 인쇄술은 그 밈을 수 천 년간 보존시키기도 하고, 말에서 말로 전해지며 변형되는 것도 쉽습니다. 그만큼 밈 복합체는 유전체 묶음보다 생존력이 강하고 진화속도도 빠른것입니다. 유전자가 만들어 놓은 기반에서만 밈이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도킨스의 밈 개념은 이기적 유전자론에 모순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당연히 이덕하님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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